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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도미니코회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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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년 성 도미니코가 설교를 통한 영혼 구원을 목적으로 설립한 탁발 수도회로써 “설교가들의 수도회”가 정식 명칭이다.

 

  성 도미니코는 스페인 오스마 교구의 참사위원으로 있던 당시, 1203년 외교 사절로서 덴마크 등 북부 유럽을 여행하면서 알비파 이단의 위협에 직면한 교회의 현실을 목격하게 되었다.그는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같이 청빈하게 생활 하면서 복음 전파에 주력하는 설교가들의 수도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수도회를 창설하게 되었다. 1216년 호노리오3세에 의해 수도회가 공식 인정되면서 도미니코 생전에 이미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그의 사후에도 도미니코 수도회는 8세기 동안 수도회의 일치를 보존해 왔으며 세계 곳곳에서 진리의 수호와 설교를 통해 교회를 위하여 크게 이바지하였다.

수도회가 창설된 70년 후까지 곧, 1310년까지를 수도회의 황금 시기라고 부른다. 성 대 알베르토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스콜라철학의 절정을 이룬 시기에 도미니칸들은 관구와 수도원들의 지속적인 설립을 통해 확장되어 나갔다. 성 히야친토와 복자 체슬라오를 비롯한 여러 수사들이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지역에 선교를 펼쳤다. 어떤 이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으나 사부 성 도미니코의 가르침을 삶으로 체현해 나가는 시기였다. 무수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탁발을 하면서 수도회의 청빈 정신과 공동 생활을 이루어 가는 열정과 모험 정신으로 가득 채운 풍요로운 시기였다. 매년 수도회 총회를 개최하여 수도회의 특징인 민주적 통치 방식을 확립했으며 그 방식은 현재까지도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다. 참된 통치가 무엇인지 보여주신 성 도미니코의 민주적 통치방식은 수도회의 일치를 변함없이 유지하고 이끌어왔으며 대화 형태는 더욱 발전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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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1300년대에는 도미니칸 재속회의 지속적인 활동이 이어졌다. 또한 라인 플라망 학파로 불리우는 마에스터 에카르트와 요한 타울러, 헨리코 수소 등이 현 독일 지역에 신비사상을 심화시켰다. 마에스터 에카르트는 교회 안에서 최고의 신비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 현 21세기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들의 영성은 도미니칸 관상 봉쇄 수도원들의 수녀들이 그들의 강론이나 강의를 헌신적 노력으로 필기하여 둔 것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

 

14세기의 대표적인 도미니칸으로서 열렬한 신비가이며 동시에 활동가였던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를 꼽을 수 있다. 성녀 가타리나는 글을 몰랐었으나 “대화집”이라는 대표적인 신비적 저서를 남겼고 수백 통의 편지를 영적 자녀들에게 보내었기에 그의 영적 유산을 현재까지 남길 수 있었다. 교회가 아비뇽 유수 혹은 아비뇽 유폐라는 상처를 안고 서구 대이교가 있었던 시기에 성녀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하였다. 중세기에 젊은 나이의 여성으로서 그렇듯이 많은 사회적 영향을 미친 일은 드물었다. 또한 성녀는 교회 안에 도미니코회의 특징인 일치를 이루어 준 아주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다. 또한 그 시대에 흑사병이 번지는 가운데에서도 결코 자신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병자들을 간호하는데 투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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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는 프라 안젤리코와 성 안토니노라는 별이 도미니코 수도회를 빛냈다. 프라 안젤리코는 이태리 피에솔레의 개혁수도원에 입회하여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라는 모토아래 살았다. 본명은 요한 이었으나 그의 그림이 너무나도 천사와 같은 아름다움의 광채로 빛났기에 “프라 안젤리코”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가 그린 주님 탄생 예고의 장면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며 마르코 수도원의 수사들의 침실과 복도, 벽, 식당, 공동방 등... 에 그려 놓은 그림들은 위대한 명작으로써 현재 미술관이 되어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적 재능만이 아니라 그의 삶도 덕행으로 빛나고 있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천상을 보지 않고서는 그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라고 격찬하고 있다. 이는 그의 삶이 바로 천사와 같이 맑고 순수하며 진리의 빛으로 빛나고 있음을 뜻한다.

 

성 안토니노는 주교로서 청빈의 삶을 사는데 전력투구하였다. 15세기의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부를 향유하고 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미니칸적인 청빈한 사목자로서 신자들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다. 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의 많은 사목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15세기를 빛낸 또 다른 도미니칸은 바로 예로니모 데 사보나롤라이다. 도시국가인 피렌체, 예술과 사치, 풍요로 빛나던 피렌체를 하느님 중심으로 완전히 바꾸어놓았던 설교가이다. 이 현세의 삶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종말론을 펼치던 그의 외침 속에는 부패되어 가던 교회의 현실이 담겨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결국 화형이라는 결말로 끝이 나지만 결코 끝나지 않은 외침이다. 그렇다면 이 21세기에 사보나롤라는 무엇을 외치는가? 우리는 무엇을 듣는가? 바로 이 세상이 끝이 아님을, 우리는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나그네임을, 앞으로 계속 걸어가야 하는 순례자임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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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의 도미니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신대륙의 발견으로 들끓던 유럽과 신대륙으로 향하는 배에는 도미니칸들도 같은 운명으로 타고 있었다. 항해 도중에 수없이 죽어가면서도 수사들은 신대륙으로 향했다. 카리브 해의 현재 도미니카 공화국에 한 공동체가 있었는데 도미니칸적인 공동 설교를 하였다. 곧 한 수사의 설교가 식민지 정부 인사들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 수사를 내놓으라고 찾아왔을 때 원장 수사는 대답하였다. “그 수사 혼자 설교를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공동체 모두의 의견을 담은 설교였다.” 인디언 인권의 옹호를 담은 도미니코 수사의 그 설교를 듣고 한 재속 성직자가 회개를 한다. 바로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신부이다. 인디언 노예를 부리던 그는 회개하여 도미니칸이 되었다. 그 뒤 그와 함께 일을 해 나갔던 사람이 있는데 바로 국제법의 기초를 놓은 프란치스코 데 비토리아이다. 한 사람은 살라망카 대학에서 법적인 이론으로 인디언 인권을 옹호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스페인과 신대륙을 오가며 몸으로 뛰고 있었다. 제네바UN본부에는 프란치스코 데 비토리아의 동상이 서 있다. 도미니칸은 현재에도 UN에 대표를 파견하고 있다.

 

16세기의 스페인 황금 시기에 루이스 데 그라나다는 영성과 신학을 동시에 겸비한 설교가로서 활동하던 사람이다. 현재에도 스페인 문학에서는 루이스 데 그라나다의 글을 반드시 필독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현대 스페인어의 초석을 놓은 문학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선교의 꽃을 피운 도미니칸들은 아시아에서도 선교의 피를 흘렸다.

한국 수도원이 속해있는 로사리오 관구는 16세기에 스페인에서 설립이 되었다. 그렇게 아시아에서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하였는데 일본에서 순교한 도미니코 회원 16명과 베트남에서 순교한 60명이 각각 성인품에 올랐다.

17세기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도미니칸의 세 송이의 꽃이 피었는데 그들이 곧 빗자루 수사인 마르틴 데 포레스, 리마의 로사, 요한 마씨아이다. 모두 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지칠 줄 모르고 헌신하였다. 이 라틴 아메리카의 삼총사 도미니칸은 “관상하고 관상한 것을 전하라”라는 수도회의 모토를 철저히 살아낸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한 없이 관상한 신비가들로써 가난한 이들을 찾아 관상한 것을 전한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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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빛이 솟아났다. 프랑스 혁명과 수도회 재산 몰수 및 수도회 추방 등의 박해와 그 여파로 고통 중에 있던 교회의 맏딸인 프랑스에서 앙리 라코르데르라는 도미니칸이 추방되었던 도미니코 수도회를 다시 열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프랑스에서 유명한 설교가로 이름을 날리던 그가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려 하자 어떤 사람이 새로운 수도회를 창설하기를 권고했다. 이에 대해 라코르데르 신부는 대답했다. “내가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여도 도미니코 수도회와 똑같거나 그보다 못한 수도회를 창설하게 될 터인데 뭐 하러 그렇게 하겠는가? 나는 차라리 도미니코 수도회에 들어가서 프랑스 땅에서 추방되었던 도미니코 수도회를 조국에 다시 열겠다.” 라코르데르는 끝까지 교황청에 충실하였고 계몽주의의 유산을 물려받은 동시대인들과 자유, 정의, 과학의 분야에서 함께 호흡하면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이끌었으며, 프랑스 교회 내의 수도생활을 부활시키는데 최선을 다한 도미니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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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을 살아간 또 한 명의 프랑스 도미니칸 마리 조제프 라그랑즈 신부는 가톨릭 성서학계에서 추앙을 받는 인물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참된 도미니칸 정신으로 살아간 정열적인 지성인이며 원전 연구뿐 아니라 현장 지리와 고고학에도 해박하였다. 가톨릭 성서 연구에 역사 비평 방법론을 도입하였고 그로 인한 교황청의 몰이해를 신앙의 순종으로 견뎌내었다. “라그랑즈 신부는 가톨릭 신앙의 노예”라는 비가톨릭 신학계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의 인내와 순종으로 말미암아 가톨릭 성서학은 정립되었고 예루살렘 성서 연구소는 꾸준히 발전할 수 있었다. 현대 가톨릭 성서학의 외로운 개척자로서 그는 구약성서학, 중간사학, 신약성서학은 물론 근동학, 고고학, 지리학까지 두루 다루었는데, 그 여러 분야에서 결코 전문가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양성과 발전에도 매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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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하는 20세기를 빛낸 도미니칸 신학자로서 에두아르트 스킬레벡스, 도미니크 쉐누, 이브 콩가르를 꼽을 수 있다.

스킬레벡스신부는 벨기에 루뱅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네델란드 니이메헨 대학에서 가르쳤다. 교회와 세상의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애를 쓴 신학자이다. 유럽 문화 발전에 끼친 공로로 신학자로서는 최초로 ‘유럽 에라스무스상’을 받았으며 네덜란드의 교회 발전과 학문 발전에 끼친 지대한 공로로 ‘네덜란드 국가 최고 훈장’ 또한 수여 받았다. 신학에 있어서 전위적 신학자 혹은 논쟁적 신학자로 평가 받으며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신앙 교리성으로부터 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3년 개최된 도미니코회 총회에서 스킬레벡스의 저서와 신학이 수도원 학생들에게 모범으로 제시됨으로써 그의 신학적 입장이 수도회에서 정식 인정을 받았다.

 

도미니크 쉐누신부는 마리 조제프 라그랑즈 신부가 성서학에서 한 일을 신학에서 실행하였다. 바로 역사 비평이 신학에서도 이루어진 것이다. 신학 안에서 역사 비평을 한다는 쉐누신부의 원리는 단순하다. 그 시대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이해한다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이 시대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그저 그 시대의 것에 절대성을 부여한다면 오히려 토미즘을 묻어버리는 것이 되고 만다. 이 시대에 적용시키면 시킬수록 더욱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원천을 제대로 파고든다면 현재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원리를 그는 신학 공부에 적용한 것이다. 그를 잘 알았던 에티엔 질송은 쉐누신부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린다. “쉐누 같은 사람은 한 세기에 한번 나올까 한다.”

 

이브 마리 조제프 콩가르 신부는 20세기 가톨릭 신학계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교회 일치를 위해 힘썼다. 도미니크 쉐누 신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르 솔코아(Le Saulchoir) 도미니코회 신학원에서 신학을 배웠고 가르쳤다. 신학자로서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인지 철저히 체험한 그의 생애는 2차 바티칸 공의회 전과 후로 확연히 갈라진다. 공의회 이전에는 교황청과의 신학적 입장 차이로 유배나 다름 없는 생활을 세 차례나 하였으나 공의회를 개최한 성 요한 23세가 모든 오해와 박해를 풀어 주어 공의회 준비위원회의 신학 고문으로 위촉하였다. 교회 개혁과 쇄신에 대한 콩가르 신부의 주장은 공의회의 진행 과정에서 그를 가장 영향력 있는 공의회 신학자로 만들었다. 교회, 교회 일치, 계시, 선교, 사제직, 그리고 현대 세계에서의 교회의 역할에 관한 공의회 문헌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역사와 현실에 대한 투명한 느낌을 갖고 있던 사상가이자 신비주의자로 평가되는 콩가르 신부는 공의회 이후에도 현대 교회에 활력을 주는 이론적, 실천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추기경으로 서임하였다.

도미니크 피레 신부는 1958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도미니코회 신학자들이 신학으로 풀어나가던 사랑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전쟁 난민들을 돌보면서 세상에 풀어 보여주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엄청난 수의 전쟁 난민들의 끔찍한 참상을 마주한 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난민 수용소에 있는 이들과 시민들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면서 난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평화의 중요성을 배우도록 그의 남은 여생을 “평화의 대학”을 창설하는데 힘썼다. 1960년4월에 대학이 시작되었을 때는29명의 남녀청년들이 모였다. “평화의 길을 따르며 자신이 지닌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나누면서 인류를 섬기자”라는 모토 아래 종교와 이상이 다른 20여 개 국의 만 오천 명 이상의 청년들이 이 대학을 거쳐갔다. 그는 제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평화와 사랑으로 치유한 아름다운 도미니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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