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도미니코의 생애
PERRO[1].GIF

도미니코는 아버지 펠릭스 데 구스만과 어머니 복녀 요안나 데 아사 사이에서 3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 큰 형 안토니오는 교구 사제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거룩하게 삶을 마쳤고 둘째 형, 복자 마네스는 수도회 창설 멤버 중의 하나로서 도미니코의 훌륭한 협력자였다.

도미니코의 탄생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일화가 있다. 그의 어머니 요안나는 그를 잉태하기 전에 환시를 보았다. 어머니는 태중에 강아지를 품고 있었는데 그 개는 입에 불 붙은 횃불을 물고 있었다. 그 개는 모태에서 나가 온 세상에 불을 지르는 것 같았다. 이 환시는 그녀가 탁월한 설교자를 잉태할 것이고 그 아기가 거룩한 가르침의 소리로 죄 속에 잠든 이들을 일깨우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가 세례 받을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징표가 나타났다. 세례 수가 그 아기의 이마에 부어질 때 그 아기의 대모는 별 하나가 아기의 이마에서 빛나는 것을 보았다. 도미니코와 오랫동안 생활한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는 항상 어떤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고 한다. 도미니코를 묘사한 미술 작품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언제나 이마에 별 하나가 빛나는 것과 입에 횃불을 문 개를 동반하고 있는 것이다.

LEARN MORE

도미니코는 신심 깊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한 어머니 요안나의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약 7살이 되었을 때 외삼촌 신부에게서 기초 교육을 받았다. 14살이 되었을 무렵 그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팔렌시아 대학에 보내졌다. 문법, 수사학, 수학, 음악, 기하학, 천문학 등의 공부를 끝내고 도미니코는 의학, 법학, 신학 중 신학을 선택하였다.

이 때 그의 참다운 심성이 드러나는데 스페인 대기근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는 주저함 없이 값진 양피지 책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이는 그가 자신의 손으로 주석을 단 책으로 그에게 매우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었다.. 그냥 자선을 한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체계를 세워서 도왔으며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본 교수들과 다른 학생들도 도미니코의 모범에 동참하였다. 도미니코에게 그 비싸고 소중한 책을 팔지 말라고 권고하는 이들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 죽은 가죽으로 공부 할 수는 없다.”

대략 24살이 되었을 때 사제품을 받고 오스마 교구 참사회에 들어간다. 참사회란 교구 사제들이 주교좌 성당에서 모여 공동 기도와 전례를 거행하고 규칙에 따라 수도자들처럼 공동생활을 하였던 단체이다. 그는 꼭 필요한 설교나 영적 지도를 위해서가 아니면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며 거의 수도원 담장 안에서 살았다. 중단 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깊은 관상에 빠져 들었다. 참사회 제의실 담당과 부원장직을 맡게고 도미니코가 내적 생활의 아름다움을 맛들이며 사도직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intro수도원.jpg
escudodelnoviciado_편집본.jpg

1203년경 도미니코는 카스티야 왕국의 알퐁소 8세의 아들과 덴마크왕가의 공주의 결혼 성사를 위한 외교사절로 장상인 디에고 주교와 함께 수행원으로 덴마크로 여행을 하게된다. 여행 도중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서 카타리파 (지역 이름을 따서 알비파라고도 함) 이단에 빠져있던 여관 주인과 밤새도록 긴 논쟁을 벌인 끝에 그를 설득하여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 때 도미니코는 카타리파 이단의 폐단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1205년경 스페인 왕의 사절로서 덴마크로 두 번째 여행을 하게 된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공주가 이미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게 되었고, 디에고 주교와 도미니코는 스페인으로 가는 대신 교황을 만나러 로마로 갔다. 북유럽 등에서 이방인의 개종을 위해 설교하는 허락을 청했으나 교황 이노첸시오 3세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카타리파 이단 문제를 해결하려는 교황 사절단을 만났고 이들은 디에고 주교와 도미니코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들은 이렇게 조언하였다. “이단자들은 굉장히 가난하고 복음정신을 살려고 하는데 여러분은 의복과 수행원 등이 너무 화려합니다. 이 모두를 내려놓고 가난한게 사도들처럼 설교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단자들을 상대로 하는 설교 사업에 뛰어든 디에고 주교와 도미니코는 프랑스 남동부 지역인 랑게독을 여행하며 설교하였다. 이때 모닥불 일화는 유명하다. 이단과 도미니코의 논쟁이 결판 나지 않자 제안을 했다. 이단의 설교를 적은 책과 도미니코의 설교를 적은 책을 피워 놓은 모닥불에 던져 넣었더니 이단의 책은 바로 타버렸지만 도미니코의 책은 튕겨 나온 것이다. 이것을 세번이나 반복 했지만 여전히 도미니코의 책은 튕겨 나와 타지 않았다. 진리는 결코 불에 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디에고 주교가 스페인으로 돌아가 사망하자 도미니코는 혼자 남아서 그 곳에서 용감히 설교하였다.

1206년경 도미니코는 이단에서 회개한 여성들을 모아 프뤼예에 관상 봉쇄 수녀원을 세우게 된다. 이것이 도미니코 관상 봉쇄 수녀원의 시작이며 800년이 넘게 이어져 내려온다.

1215년경 도미니코는 기증받은 집을 토대로 삼아 툴루즈에 공동체를 세우게 된다. 이단을 맞서 싸울 공동체를 세운 것이다. 그 뒤 툴루즈의 풀코 주교를 동반하여 제 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 곳에서 이노첸시오 3세 교황을 만나 수도회 창설을 청했고 교회 안에 이미 승인된 규칙을 정해 오면 인준해 주겠다는 구두 허락을 받는다.

1216년 툴루즈로 돌아와 형제들과 의논해 아우구스티노 규칙을 정해서 로마로 돌아가나 이노첸시오 3세는 사망하고 새로운 호노리오 3세 교황을 만나게 된다.

1216년 12월 22일 호노리오 3세의 인준으로 “설교가들의 수도회”를 창설한다.

1217년 8월 15일 도미니칸 성령강림으로 불리우는 수사들의 파견을 강행한다. 몇 안되는 젊은 수사들을 유럽 전역으로 파견하겠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반대했댜. 그러나 도미니코는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잘 압니다. 밀알은 모아두면 썩지만 흐트려 뿌리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 때부터 1221년 8월 6일 선종할 때 까지 도미니코의 끝없는 여행이 시작된다. 파견된 수사들은 많은 어려움과 실패, 난관에 봉착하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도미니코의 슬기롭고도 조직적인 통치 방식에 도움을 받아 모두 이겨내고 파견된 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수많은 성소자들로 수도회는 꽃을 피우게 되었고 많은 열매를 맺었다. 도미니코는 전 유럽에 퍼져 있는 각 수도원을 일일이 걸어서 방문하였고 수사들의 어려움을 돌보며 지도하였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선포하기 위햐여 남김없이 다 바쳤다.

1234년 7월 3일에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Anonimo 07 s-XVII_편집본.jpg

bottom of page